생선 통조림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던 ‘혹가이도’의 한 어촌마을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갈매기들이 바닷가에서 떼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흉흉한 괴담들이 퍼져나가 이 마을에서 생산하는 통조림은 물론 건어물에 이르기까지 시장에서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촌마을 주민들은 당장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졌고 마을 전체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상부의 어촌관계자들은 해양 환경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현지에 급파하여, 물의 오염여부, 치어들의 감염여부, 갈매기들의 건강상태 등을 면밀히 검토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정상이었고 달리 갈매기의 ‘사인’이라 할 만한 원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단지, 조사단을 통해 알아낸 것은 물의 오염이나 병원균의 감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이 마을의 어촌계장이 마침내 그 사인을 찾아내게 됩니다. 어이없게도 사인은 ‘굶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살아남은 갈매기들도 머지않아 대부분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비극의 발단은 마을에서 어묵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물고기의 몸통으로 통조림을 만들고 난 후, 물고기의 머리, 꼬리, 내장들을 바다에 버렸고 어촌마을의 갈매기들은 버려진 것들을 먹으며 살아갔습니다. 굳이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먹이를 구하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최근들어 마을에서 버려지던 생선부위로 어묵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이로인해 더이상 쉽게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된 갈매기들은 샤냥하는 법을 잊어 모두 굶어죽게 됩니다. 고기 잡는 기술을 잃어버린 자생력 없는 그들을 구제하는 길은 두 가지 입니다. 원래대로 먹이를 뿌려주거나, 다시 생선 잡는 기술을 가르치거나. 쉽게 먹이를 구하는 환경에 의존한 채 다음 세대에 샤냥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결과가, 사냥하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은 결과가 결국 떼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습니다.
‘가르침’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 주님은 승천하시기전 이처럼 ‘가르침’의 중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르치는 일’에 참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다시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갈매기가 ‘고기 잡는 법’을 배우지 못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우리의 자녀도 참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본래,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자’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를 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유통시킵니다. 이로써 ‘부메랑’처럼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그 축복과 생명을 ‘배우는 자’와 함께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가르침이 유통되지 않으면 함께 망합니다.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증언해 온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지 않을 때 공동체는 무너졌습니다. 이 시대야말로, 위대한 일을 위임 받은 우리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끊임없이 가르쳐야 할 시대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좋을 때에도 좋지 않을 때에도 ‘가르침의 일’이 중단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의 사역을 위임받은 모든 분들에게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유통하는 역사가 불처럼 퍼져나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