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사랑의교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행복 – 페르페투아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결혼도 잘한 젊은 어머니 비비아 페르페투아는 3세기 초 북아프리카의 성공한 여성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가 기독교 회심 금지령을 반포하면서 그녀의 평화로운 삶은 소외의 전쟁터로 변했다.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해서 자기에게 제사드릴 것을 온 국민에게 명했다. 거역하는 자들은 오락의 도구가 되어 원형경기장에서 짐승들에게 던져졌다.

귀 부인이었던 페르페투아가 체포되자 그 아버지는 신앙을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도록 종용하였다. 페르페투아는 겨우 21세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이 물병이 보이세요?”

“보이지.”

“이걸 물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그 이름이 되나요?”

“그건 아니겠지.”

“만물이 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새로이 바꿀 수 없듯이 나도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을 바꿀 수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페르페투아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내 말에 격노하여 눈이라도 뽑을 듯이 달려들었다.”

주후 203년 3월 7일, 페르페투아는 여자노예 렐리키타스와 함께 원형경기장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두렵지 않느냐는 간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재 나의 고통은 나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맹수들에 대항할 때는 내 아닌 다른 이가 내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니 그가 내 대신 고통을 받으실 것이 분명하다.”

페르페투아가 그의 노예인 펠리키타스의 손을 잡고 원형경기장에 나타났다. 경기장을 꽉 매운 군중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귀부인이자 자유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시실 때문에 놀란 것도 아니었고, 죽음을 앞두고도 침착함과 예모를 흩트리지 않는 것 때문에 놀란 것도 아니었다. 군중들이 놀란 것은 자유인(自由人)인 페르페투아가 노예(종)인 펠리키타스의 손을 잡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동료’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 이지 인격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인이 노예와 한 상에서 음식을 먹거나 같은 자리에 동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노예는 손을 잡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페르페투아는 수많은 이교도들 앞에서 기독교 신앙은 견딜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는 용기이며,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는 신앙의 위대성을 공개적으로 시위한 것이다. 그의 침묵은 웅변이었다. 그는 말없이 신앙의 힘을 보여 준 것이다.

곧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는 달려드는 들소에 의해 받혀 몸은 찢겨가기 시작했다. 찢겨진 몸으로 페르페투아는 자신의 머리를 묶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슬픔과 애도의 상징인데, 이 날은 그녀의 가장 축복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번을 뿔로 받혔지만 죽지 않자 군중은 황제에게 “그만하라!”고 호소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검투사가 나타났다. 두 여자의 머리를 베러 나왔지만 페르페투아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 비정한 해결사의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흐트러진 검투사가 첫 일격을 가했지만 역시 상처만 입혔을 뿐 페르페투아를 죽이지는 못했다.

결국 두 여인은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나눈 후 검투사의 손을 잡고 자기 목에 대 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하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는 사회적 신분의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격노한 아버지에게 “저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없어요.”라고 당당히 말하며, 주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무서운 죽음을 기꺼이 맞이했던 이 젊은 여자의 뜨겁고 강하고 용감한 믿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입니까?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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