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중국 복건성에서 한 아이가 출생합니다.
이 아이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다른 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난히 바둑에 재능이 있을 뿐입니다. 불과 대여섯 살부터 내기바둑으로 살림을 도울 정도로 바둑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기원에 나가 상대를 기다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무렵 중국을 방문한 일본 바둑계에 프로 기사와 우연히 대국을 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열 살배기 어린아이가 누구든 상대하겠다는 의지로 낡은 바둑판 앞에 홀로 앉아 바둑 수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장난삼아 한수 두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몇 차례를 거듭 두었음에도 프로는 이 아이를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천재 소년 오청원은 일본으로 초청되어 공식 테스트 받게 됩니다.
일본 바둑계의 명인 ‘슈사이’와 두 점을 깔고 공식 테스트 대국을 두게 됩니다. 바둑계의 원로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고수들의 관심 속에 대국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바둑 규칙은 시간제한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끝나지 않으면 또 하루, 이런 식으로 7일간을 밤낮으로 두게 됩니다. 결국 4점을 패하는 것으로 1차 대국이 끝납니다. 발칵 뒤집어진 일본 바둑계는 패배한 대국을 계기로 소년 ‘오청원’을 일본기원의 정식 멤버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바둑의 종주국인 중국을 앞지를 수 있는 현대 바둑의 시조가 된 겁니다.
바둑은 첫 수를 어디에 두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 첫수의 첫 돌을 두는 곳이 소목점이었습니다. ‘오청원’ 으로부터 시작된 화점바둑 이후로는, 대부분 첫수를 화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화점이란, 바둑판 위의 9개 까만 점 중 귀퉁이의 네 점을 말합니다. 소목점을 시작으로 견고한 전략구조를 이루었던 오랜 전통의 공인된 최고의 전술은 ‘오청원’의 등장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소목점에서 화점까지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한 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정 관념이 만들어낸 한 칸의 거리를 좁히는 데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이 사실은 바둑이 주는 좋은 교훈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둘 수 있는 첫 돌의 위치를 소목점이 아닌 화점으로 가져가는 그 길은,
그동안의 고정된 생각이 흔들려야 갈 수 있는 좁은 길이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가득 쥔 손으로는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 나가는 성장과 가지고 있던 것을 털어내 비우고 새로 시작하는 성숙은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태 13: 4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관념의 길을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일본 바둑계의 고수들도 상당한 갈등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 ‘보화와 같은 어린 소년을 따라 가야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가 던 길을 가야 하느냐’ 이는 처음 보화를 발견하고 그동안의 모든 생각들이 흔들리던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변화를 위해 흔들리는 경험은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 13: 45~46)
그동안 소중히 여겨오던 것들을 버려야 하느냐 마느냐 결단이 요구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 하던 믿음의 선진들도 이 같은 쩔쩔 매던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방이 너무 밝은 것 같아 불을 잠시 껐다. 순간 깜작 놀랐다 내방에 불을 끄자 창 밖에 어둠과 흰 눈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내 안의 불을 끄고 나니 내 앞의 세상이 훨씬 잘 보였다.”
주님! 내 방에 밝은 불을 끄고 창밖에 어둠과 흰 눈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