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사랑의교회
시간이라는 열차를 타고

시간이라는 열차를 타고

오늘 날에는 어느 분야의 학문이던 마음만 먹으면 아무데나 뛰어들 수 있습니다.

학문의 디지털 시대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공과대학생이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하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경제 평론가로 활동하는 것 등이 좋은 실례입니다. 그들이 모두 뛰어난 천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학문 간에 간격이 좁혀졌고, 학문의 영역들이 다중 구조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영어 사전에도 없는 메타 사이언스(meta science)라는 신조어가 등장 합니다. 예컨대 역사학은 인간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인류학도 100만 년 전의 인류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고고학과 고생물학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접학문들과 하나가 될 때 ‘참다운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아날로그식 학문 간의 칸막이는 더 이상 의미 없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수님의 질문에 한 학생이 답변하기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됩니다.” 같은 질문에 또 다른 학생이 전혀 다른 답변을 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 모두 정답 들입니다. 다만 이성적 답변을 기대 했느냐 아니면 감성적 답변을 유도 했느냐에 따라 후한 점수를 줄 수도 박한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정신은 이성과 감성의 복합구조이기 때문에 정답은 둘 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어령 교수는 창조경영 강연 중에서 이런 말을 함으로써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컴퓨터가 주류를 이루는 디지털 시대이기는 하지만, 인간적 감성을 중시하는 ‘아날로그’가 꼭 필요한 ‘디지로그’ 시대입니다.” 적절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전혀 다른 것이 합하여 하나를 이룬다는 무경계를 의미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르디라는 오페라 극작가는 창작극의 시연을 보고난 후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인간의 절반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절반은 흙이기 때문에 하늘 높이 오르려 해도 흙이라 날을 수 없다. 차라리 포기하고 땅에 묻히려 해도 나머지 절반은 신의 모습을 한 영혼이라 묻을 수 없구나. 날을 수도 없고 묻힐 수도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그저 인간일 뿐이로구나.” 이처럼 인간은 더 이상의 아래, 더 이하의 위에서 엉켜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무엇으로부터 제한된 자유와 선택 안에서 본인에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존재, 타자(他者)의 의지에 이끌려 정하여진 출구를 향하여 가는 ‘시간이라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승객들은 흙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학문 자체의 경계가 없어져야하며 영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도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학문 자체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여 집니다. 영국의 뉴케슬대학 이론 물리학교수 폴 데이비스(Paul Davis)박사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라는 책에서 “과학이 이제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있다.”고 말합니다. 레이저 광선의 원리를 발견하여 1964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찰스 타운(Charles townes)박사는 “우주 안에 정교한 법칙들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초월적인 지적존재가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생각속의 초월적인 지적존재가 누구란 말입니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분께서 디지로그가 끌고 가는 시간이라는 열차를 멈추어 세울 것입니다. 승객들은 하차하여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 신의 세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감동을 받아 사는 사람들은 이 경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으로 살아가는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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